인문학과 젊은이들의 꿈은 함께 멸종했는가?
게시글 주소: https://orbi.kr/0002103004
부제를 붙이자면
나 자신을 포함한 이 시대의 수험생들 그리고 오르비에 대한 단상
쯤 되겠네요.
다소 길고 지루한데다 두서도 없는 글이기에 꼭 읽으시길 권장하지는 않겠습니다.
재미없는 걸 억지로 해야 하는 것만큼 괴로운 것이 어디 있겠어요.
하지만 저는 이 이야기를 그저 하고 싶었고, 어쩌면 제가 밑에 써 내려간 이야기는
여러분이 아니라 저에게 하는 이야기일 수도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재수해서 이대 사회과학부에 들어갔고, 다시 반수를 해서 이번에 수능을 보았습니다.
저도 오르비에 들어오시는 대부분의 분들과 마찬가지로
이 점수로 무슨 대학 무슨 과에 원서를 써야 합격을 할 수 있을 지가 최대의 관심사입니다.
저는 고등학생 때부터 재수할 때까지는 정치외교과에 뜻을 두었습니다.
작년에 원서를 쓸 때도 더 좋은 대학의 정치외교가 아닌 다른 과를 갈 수 있었으나
제가 공부하고 싶은 것이 있었기 때문에 쓰지 않았습니다.
정확히는 쓰지 못했습니다. 기숙학원에서 재수까지 했는데
대학에서 제가 원하는 공부를 하기가 힘들 것이라 생각하면 절대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대도 제 이상의 대학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사실 서울대만을 바라보고 공부했기에 1교시의 자꾸만 부러지던 샤프심들, 너무 쉬웠던 모의평가들,
수능날이 다가올수록 오히려 나태해졌던 제 자신까지 모든 것이 원망스러웠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대학도 가지 않고 반년정도 홀로 여행을 다닌 후에 다시 수능 공부를 하고 싶었습니다.
몸도 정신도 너무 지쳐있었습니다.
재수학원에서 저는 정말 확실한 제 꿈을 찾았다고 생각했는데, 누구보다 치열하게 자기탐색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수능 점수와 입시 결과에 저는 풍화된 바위처럼 브스스 흩어져 내렸습니다.
대체 왜 그 점수를 받은 것이냐?
라는 아버지의 질문에 저는 그저 울기만 했습니다.
대학 오리엔테이션도 입학식도 아무것도 가지 않았습니다.
그러고 대학에 가니 이대 특성상 그리고 학부의 특성상 정말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안 생기더군요.
3,4월달은 그저 너무나 우울해서 수업도 잘 가지 않고 집에서 자거나 멍하니 누워있던 적이 많았습니다.
확고하게 품었다고 생각했던 제 꿈이 이제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리 떠나간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정치 및 여러 강의를 듣고, 학회나 동아리를 통해 여러 사람들을 만나면서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정치를 하려면 정치외교과에 가야만 한다는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또한 학문으로서의 정치가 제 적성에 그다지 맞지 않는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제가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철학이었습니다.
고전을 읽고, 철학과 선배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철학을 공부 하고 싶다는 생각을 다잡게 되었습니다.
근데 저는 왜 반수를 해야 했을까요?
연대 철학과 자기소개서 쓰는 것을 도와주신 분이 이렇게 물었습니다.
너는 왜 꼭 연대 철학과를 가고 싶어하는 거니? 철학을 공부하고 싶은 것이라면 이대이든 연대이든 무슨 상관이니?
저는 그 대답에, 지금 그 질문은 가난한 사람한테 너는 왜 돈이 없냐고 묻는 것과 같다며 울어버렸습니다.
근데 저는 왜 울어버렸을까요?
정말로 저는 왜 꼭 수능을 한 번 더 봐야만 했던 것일까요?
제가 하고 싶은 공부가 무엇인지도 알았고 좋은 사람들도 만났는데 그리고 생각했던 것보다 이대가 좋은 대학이라는 것도 알았는데.
단지 이대에 원서를 쓰면서부터 반수를 해야겠다고 결심했기에 자신과의 약속을 이행해야 하는 그 당위 때문인지.
사실은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너무 철저하게 내면화되어 있던 나의 학벌지상주의 때문인지.
좀 더 자신을 깊이 캐보면 핵심적인 이유에 도달할 수도 있었지만 그리고 지금도 그렇게 할 수도 있지만 저는 그냥 덮어버렸습니다.
꽉 찬 쓰레기통에 뚜껑을 덮듯이 그냥 무시해버렸습니다.
그래 어쩌면 나는 속물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만 그게 그렇게 중요한가? 일단 수능을 잘 보자. 라고 스스로에게 말하면서요.
그리고 수능이 끝났습니다. 반년동안 뇌를 비웠습니다.
그래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점수도 목표에 미치진 못하더라도 나름대로는 만족할 수 있을 정도로 나왔습니다.
인생이 길이라면, 저는 그 길 위에 서서 헤매지 않고 나아가고 있는 것인지,
앞을 향해 똑바로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는 데 사실은 숲 속에서 같은 자리를 맴돌고 있던 것은 아닌지,
어느 순간에도 확신할 수 없고 모든 것이 불확실한 미래가 두렵습니다.
지금 오르비에는 이런 글들이 넘쳐납니다.
000/000/000/00/00 이 점수로 어디 까지 갈 수 있을까요?
무슨 대학 무슨 과 갈 수 있을까요?
무슨 대학 사학과 까진 갈 수 있을까요? 철학과는 갈 수 있을까요? 신학과라도 갈 수 없을까요?
저는 이런 글들을 보면 마음이 아픕니다.
어른들의 요즘 젊은이들 수능본다고 고생하는 거 보면 마음이 아퍼, 라는 말씀에서 묻어나오는 동정심과는 다릅니다.
저도 끊임없이 저런 질문들을 던져왔고 지금도 그러하기 때문이죠.
또 많은 수험생들이 '그 대학'을 가기 위해 가고 싶은 과에 상관없이 흔히들 '낮은 과'라고 하는
독문, 노문, 불문, 사학, 철학, 신학, 교육학 등에 지원할지 말지 망설이게 되는 이 현실이 가슴 아픕니다.
정말로 언제부터 그다지도 실용적인 학문이 대학을, 나아가선 사회를 움직이게 된 것인지.
사학과나 철학과에 진정 가고 싶은 대학생들은 왜 '그 대학'만을 가고싶어 하는 학생들에게 밀려나야 하는 것인지.
(이 글은 한 번 읽어보시길 권장합니다. http://www.hani.co.kr/arti/SERIES/57/493836.html)
왜 대학을 가야 하고 왜 그 대학 그 과에 가야 하는 것인지?
저는 세 번의 수능을 봤고 이제는 외국어를 공부하고 면허를 취득하라는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가고 싶어하는 철학과를 부모님은 그다지, 가 아니라 정말로 원치 않으십니다.
이 시대에 경쟁력을 갖기 위해선 실용적인 학문을 해야 한다는 말씀을 하시면서요.
근데 저는 자꾸 회의가 듭니다.
실용적인 학문이란 도대체 무엇이며 경쟁력을 가져야만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경쟁력을 가져야 하는 이유가 나의 평안한 생존을 위한 것이라면
나는 내가 포기한 모든 것들을 넘어서는 행복을 단지 그 생존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일까?
평안한 생존이 오로지 삶의 목적이라면 나는 왜 태어났다가 다시 죽어야 하는 것인가?
오직 살기 위해 사는 삶은 대체 나에게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단 말인가?
제 자신에게 던지는 어떤 질문에 대해서도 저는 대답할 수가 없습니다. 알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끊임없이 질문할 뿐입니다. 그것이 제 생에 어떠한 의미를 가져다 줄 것이라는 미미한 확신을 갖고 말입니다.
저는 요즘 그렇게나 '강요'하는 '꿈'에 대해서도 회의적입니다.
젊은이들이여, 야망을 가져라! 꿈을 꾸어라! 청춘이여 좌절하지 말라! 앞으로 나아가라!
저런 문구들의 비슷한 제목을 가진 책들이 베스트셀러로 속속 팔려나가고 또 사들입니다.
하지만 요즘 시대가 강요하는 꿈은 과거의 혹은 진정한 의미의 꿈과는 그 의미가 퇴색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진정한 꿈이라면 그 자체로도 빛이 나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어른들이 말하는 그 꿈들은 종국엔 흔히들 말하는 '사회적 성공'(즉 돈과 명예)가 마련되어 있더군요.
그렇다면 실패한 사람이 꾸던 꿈은 진정한 꿈이 아니었던 것인지.
성공한 뒤에야 그것이 꿈이라고 말하고 책을 쓸 수 있는 것인지.
왜 그 꿈들은 CEO, 외교관, 변호사, 영화 감독, 연예인의 이름은 있는데 철학가, 역사가, 인문학자, 소설가, 시인의 이름은 없는 것인지.
모든것이 불확실한 시대이고 그 불확실성은 나날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미래에 대해 확실성을 갖는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그 불가능한 일을 조금이라도 손아귀에 쥐기 위해서
왜 우리는 이 값진 현재를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하고 꾸역꾸역 다퉈야 하는 것인지.
알 수 없고, 알 수 없다는 사실에 더욱 슬픕니다.
다만 하나의 질문을 던집니다.
당신의 삶은 무엇을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하시나요?
(혹시나 끝까지 읽어주신 분이 계시다면, 긴 글 읽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비문이나 오타 지적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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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님은 같은철학을배우는곳이면 다같은곳인데 꼭연대철학과를가고싶었던 이유가 무엇이엇나요?
결국은 저도 학벌 지상주의가 내면화 되어있기 때문이죠.
저도그렇고대한민국의거의모든사람이그런생각을갖고있는것같은데요 정확히어떤이유때문에학벌지상주의가뿌리내리게된걸까요?우리나라에요
그건 제가 여기서 답해드리기에는 너무 긴 시간이 걸릴 것 같네요...
그래도 짧게 제 생각을 말씀드리자면
신분제+과거제 로부터 내려온 뿌리깊은 엘리트주의 및
현실 사회의 반영이죠
학벌지상주의와 명문대 선호 경향 중 어느 것이 먼저냐는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하는 문제겠지만
실제로 인재들이 명문대에 더 많을 '확률'이 높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죠;
지금 생각나는 것은 이 정도인데 님이 더 생각나는 이유가 있으신지 궁금하네요
혹시네이트온하시나요?많은얘기를듣고나누고싶어서요..
잘 읽었습니다. 저도 지금 원서 알아보고있는 수험생인데 많은 도움이 되었어요~
그런데 저는 제 전공(하고싶은 공부)에 대해 뚜렷하게 잡히는 게 없어서요~
저 역시 철학도 좋고.. 사학도 좋고... 어문계열도 좋고... 사회과학쪽도 좋고... 애매한 상황인데
혹시 자신에게 맞는 공부를 구체화하는 데 도움이 될만한 책은 없을까요? 혹시 생각나시는 책이 있다면 조금이나마 추천 부탁 드립니다~
자신의 꿈을 탐색해 가는 과정은 많은 경험을 하고 오랜 기간 고민해야 합니다.
간단하게 꿈을 정하고 그 길을 쭉 따라 갈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가 더 많으니까요..
저도 지금은 철학과를 가고 싶지만 또 바뀔 지도 모르는 것이고...
저는 일단 대학에 가서 진로를 고민중인 분야의 강의를 들어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아니면 철학이 되었든 사학이 되었든 그 분야의 고전이나 유명한 저서들을 읽으며 어느 것이 더 재미있고 공부하기에 적성에 맞는지 판단하는 게 낫지 않으실까..합니다.
자신에게 맞는 공부를 구체화하는 데 도움이 될만한 책은 무엇을 추천드려야 할 지 어렵습니다만,
제가 학회에서 만난 회사원 분이 제게 추천해주신 책이 있습니다.
다치바나 다카시의 <청춘표류> 라는 책인데요. 그 분은 한양대를 나와서 대기업에 취직 하셨는데,
자기는 왜 대학생 때 이것저것 해보지 않고 그냥 공부만 했는지에 대해 후회한다고 하시면서 저한테 저 책을 권하시더군요.
주장이 아닌 일화의 나열로 구성되어 있는 책이지만 읽고 난 뒤 울림이 있었습니다.
무식한 저지만 제 댓글이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ㅠㅠ. 청빈예찬님, 힘내세요~
소중한 댓글 감사합니다 ^^
인문대-인생을 어떻게 풍요롭게(정신적) 살수있는지배움.
상경대-인생을 어떻게 풍요롭게(물질적) 살수있는지배움.
이거아닌가요?ㅋ 둘중알아서선택..
어차피 상경대는 갈 생각이 없어서...ㅋㅋㅋ
저는 그 대답에, 지금 그 질문은 가난한 사람한테 너는 왜 돈이 없냐고 묻는 것과 같다며 울어버렸습니다.
<< 이 말이 무슨 뜻인가요? 제가 독해력이 후달려서;;
저도 철학 한 번 제대로 배워보고 싶어서 "난 점수가 어떻게 나오던 인문대만 쓸 거니까 억울한 일 없게 서울대 가자"라는 마인드로 공부하고있는 재수벌렌데요,
저도 님처럼 그런 생각 많이 하는데, 솔직히 답 없는 거 아닌가요.. 어차피 나 자신도 현실에 적응해서 살아가야되는데, 부처도 아니고 마냥 물질적인 것, 세속적인 성공, 명예 다 무시하고 살 수 없으니까요.
그리고 CEO, 외교관, 변호사, 영화 감독, 연예인이라고 다 속물이 아니고, 철학자, 소설가 라고 해서 마냥 정신적으로 행복하고 평안한 것만은 아니라고 봐요. 저는 어떤 분야에서건 성공한 사람들은 그 나름대로 자신만의 철학과 그 자체로도 빛나는 꿈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실제로 성적 맞춰서 철학과 갔는데 의외로 자신한테 맞는 학문을 찾아서 그 길로 나아가는 사람들도 많을 것 같은데요...
학벌지상주의 때문에 낮은 과를 쓰더라도 그 대학을 가겠다는 입시생들이나, 인문학을 천대하는 사회적 풍토나 그런 것들이 사회 구성원 개개인의 책임 보다는 사회 그 자체가 안고있는 고유의 문제가 아닐까 생각되요. 자본주의 사회, it시대에 인문학이 어떤 뿌리나 기둥 역할을 할 수 있어도 중심 무대가 되지 못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거 아닐까요..
쓰다보니 개소리가 됬네요... 하여튼 이것도 저 자신한테 하는 말인 듯 합니다. 하여튼 이러나 저러나 뭐 같긴 매한가지네요.. 에휴
간단하죠.
철학의 발생기원을 보면 답이 나옵니다.
철학은 당장 먹고 살 걱정에 바쁜 평민들로부터 시작된게 아닙니다.
과장되게 말하자면 철학은 어느정도 부와 지위가 보장된 계층의 사치에 가까운 생각이죠.
물론 님이 말씀하신 것 처럼, 삶이 단지 먹고 사는 것에 그친다면 의미가 없겠죠.
하지만 먹고 사는 것이 보장되지 않는 삶은 존재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배고픔 속에서도 꿈을 쫓는게 진정한 의미가 아닌가라고 반박하실 수 도 있지만
다른 측면에서 보면 그러한 사람은 단지 가족을 굶기는 무책임한 가장일 뿐입니다.
마지막에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해 서술하셨네요.
이러한 빠른 변화는 이러한 현상을 더 부추길 뿐이죠.
빠르게 변하는 미래 속에서 일반적인 사람들에게 철학은 단순히 과거의 담론 수준 이상의 가치를 가지지 못할때니깐요.
님이 보시기에는 단순히 돈과 명예를 쫓는 일반적인 사람들이 한심하게 보이실 수 있어도
그들의 입장에서는 님의 이러한 생각이 가진자의 사치 라고 생각할 뿐입니다.
정말 좋은글이네요..글속에서 제 모습을 보는듯한 착각에 빠질만큼 제가 고민하는것과 비슷하네요 이유는 모르겠지만 위로받고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