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의 화원 [743476] · MS 2017 (수정됨) · 쪽지

2021-06-06 19:07:56
조회수 2,551

2022학년도 6평 윤사 이의제기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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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와 사상 1번 제시문 - 스승의 말투가 이상하단다.>


윤리와 사상 1번 제시문 - 스승의 말투가 이상하단다.


와~ 이런 걸로 이의제기를 할 지는... 정말 꿈에도 생각 못해봤습니다.


제자들이여!

'~뽇어나가지 못하게 된단다.'

'~그 뒤에는 만족할 줄 안단다.'

'~스스로 알게 된단다.'


제자들이여! 부르고 나서

'~된단다.'라는 말투 이상하지 않나요?


첫째, 스승으로서 格 떨어지는 말투

둘째, 제자를 아이 취급하며 말하는 말투

셋째, 제시문 내에서 호응되지 않는 말투

넷째, 선지와 호응되지 못하는 말투


가장 심각한 이유는 넷째 이유입니다.

선지에서는 '~된단다.'로 해서 스승의 제자들에 대한 권유를 나타내고 있지만,

선지는 이와 다르게 '이르러야 한다', '벗어나야 한다.', '형성해야 한다.', '쌓아야 한다.', '힘써야 한다.'로 말함으로써 당위를 나타내기 때문이죠.


'이다'에서 '해야한다'로 어떻게 이렇게 나아갔을까요?

논리적 비약이죠.

철학과 1학년 학부생 정도만 되도, 아니 윤리과 1학년 학부생 정도만 되도 알고 있지 않을까요?

도대체 누가 낸걸까요?

'이다'가 어떻게 당위로 넘어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어야만 이 문제는 비로소 성립됩니다.

논리적 비약입니다. 오류죠.


문제가 왜 이리도, 나날이, 이렇게 만들어질까요?

걱정입니다.







<윤리와 사상 4번 문제 ②번 정답 교육과정 이탈>


윤리와 사상 4번 문제 ②번 정답 교육과정 이탈


② 인간은 인식 능력 및 실천 능력을 통해 본성을 변화시킬 수 있는가?


아이고...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순자가 얘기했던 "인간의 본성은 악하다. 그 선한 것은 인위적인 것이다." 성악편 첫 머리에 나온 말을 조목조목 따질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즉 선하게 행동하게 하는 내적 동력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답할 수 있는 수준이 되어야 풀 수 있는 문제라는 겁니다. 제시문에서 보여준 것은 스승이 왜 필요한지만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스승은 외적 동력이죠. 인식 능력은 스승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적 동력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문제는 인식 능력이 있으면 악한 본성을 변화시킬 수 있나요? 왜 ‘도덕 인식 능력’이라 하지 않고 그저 ‘인식 능력’이 악한 본성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선지에 썼는지 저는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결과적으로... 이 문제는

첫째, 고등학교 수준을 넘어선 문제죠. 물론 교육과정 이탈이구요.

둘째, 제시문에서는 외적 동력만 보여주고 있습니다. 스승이요. 그런데 선지에서는 인식 능력을 말함으로써 '내적 동력'을 묻고 있습니다. 말이 안 되죠?


순자에게 있어서 악이 성립되는 조건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성, 정, 욕 자체가 악이구요. 다른 하나는 마음속의 욕망과 감정이 행동으로 변화되어 나오는 게 두 번째 악입니다. 우리가 눈여겨 볼 것은 성 자체를 악이라고 한 것이 문제가 됩니다. 이것은 ‘도덕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내 안에 어디에도 없다는 걸 보여줍니다. 그런데요. 이걸 고등학생 수준에서 묻는다구요? 조심스럽게 묻습니다. 그렇다면 출제자는 알고 있나요?


후천적인 노력을 통해 악한 본성을 선하게 하는 것은 가능하다고 제시문에서도 보여주었습니다. 스승을 통해서요. 우임금 같은 성인이 그 스승이 되겠지요. 그렇지만 선지에서 보이는 '인식 능력'은 무엇을 두고 한 말일까요? 이것을 풀려면 '선의 본성은 갖추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선을 알 수 있고, 선을 행할 수 있다.'가 말이 되어야 합니다. 순자는 내적 도덕심을 인정하지 않는데 말이죠. 분명 그의 주장은 외부에 도덕법칙이 존재한다고 보는 것이 옳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 도덕법칙을 인식할까요? 그것은, 순자 자신이 인간은 '인식할 수 있는 존재'라고 명명한 바를 근거 삼아야 합니다. 이것은 순자의 도덕론의 주를 이루게 됩니다. 아쉽게도 후세 사람들은 그의 주장을 비판 없이 받아들여 어설픈 그의 도덕론을 풀어서 내놓습니다.


지금부터 인용하는 글은 교과서에는 나오질 않습니다. 순자에 나오는 내용을, 교육과정 이탈임을 보여주기 위해 옮겨적습니다.


'인지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며, 인지되는 것은 사물의 이치이다. 인지할 수 있는 인간의 본성으로 인지되는 사물의 이치를 탐구할 수 있다.'


순자에게 있어서 심을 천군으로 지칭합니다. 심은 마음 한 가운데 있고, 인식하고, 실행하는 전 과정을 주관합니다. 인간의 도덕 행동을 주관하는 역할을 한다고 하죠. 심의 내적 인식은 감각에 대한 것, 그리고 감정과 관련된 분별적 인지 두 가지입니다. 다시 순자를 인용하면


'천관에 의한 내적 인식과 마찬가지로 외적 인식도 심의 생래적 기능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도를 인식할 수 있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인간은 어떻게 도를 알 수 있는가? 심이다.'

'길거리의 사람이라 할지라도 모두 인의법정을 알 수 있는 자질이 있다.'


고 말합니다. 결과적으로 본다면 순자는 순환논리에 빠져있죠.


인간은 악하다 -> 그럼에도 마음이 도덕적 인식을 가능하게 한다 -> 누구나 도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순자가 말하는 사려를 가져와도 마찬가지입니다.


'발생하는 감정을 마음이 선택하는 것을 사려라고 한다. 마음이 사려하고 그것을 위해 움직일 수 있는 것을 작위라 한다. 사려가 쌓이고 능력이 익숙해진 다음에 이루어지는 것을 인위라 한다. 이익을 올바르게 추구하는 것을 사업이라 한다. 의로움을 올바르게 추구하는 것을 행위라 한다. 사려하는 자라면 욕망의 추구를 조절할 수 있다.'


발생하는 마음을 선택하는 사려가 있다 -> 사려로 인해 욕망의 추구를 조절할 수 있다. -> 마음(본성)은 악하다 -> 결국 선택하는 것은 악할 수밖에 없다


순자편 어느 부분을 보더라도 마음이 본성과 다르게 어떻게 작용할 수 있는지 설명한 부분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아니 그에 대한 구체적 언급 자체가 없습니다. 결과적으로 보자면, 순자의 심의 철학으로는 ‘도덕 인식 능력’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합니다.


뭐, 물론 선지에서는 ‘도덕 인식 능력’이 아니라 ‘인식 능력’만으로도 악한 감정을 선하게 바꾼다고 얘기하지만요. 문제 수준... 이제 좀 높일 때가 되었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리고 교육과정 이탈을 하더라도 제발 좀 정확한 지식을 물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윤리와 사상 5번, ②번, ③번 선지 오류>


윤리와 사상 5번, ②번, ③번 선지 오류


“객관적 행복은 신 자신이지만 주관적 행복은 신 속에 있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그 어떤 것이며, 따라서 이 주관적 행복은 피조물적인 그 어떤 것이다.”(Summa Theologiae)


인간이 추구하는 행복은 현실적인 목적을 필요로 하죠. 인간이 추구하는 행복이 선악의 척도가 되려면, 행복은 구체적이고 개별적이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행복은 시대와 공간을 넘어서는 어떤 보편적인 타당성을 상실하게 되죠.


행복은 부에서 비롯되는가?

행복은 명예에서 비롯되는가?

행복은 남들의 존경이나 명성에서 비롯되는가?

행복은 인간의 권력에서 나오는가?

행복은 인간의 육체적 선에서 비롯되는가?

행복은 쾌락에서 비롯되는가?

행복은 영혼의 선에서 비롯되는가?

행복은 창조된 것에서 비롯되는가?


위와 같은 물음에 대해 결국 아퀴나스는 인간을 완전한 행복으로 이끌어 가는 것은 초월적인 것이고 이상적인 것이며 신 안에 있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내용은 제시문에서도 언급되어 있죠.


그런데요. 선지에서 보면, '③ 완전한 행복에 도달하게 되면 삶의 목적이 실현된다.'고 했죠. 아퀴나스의 글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Summa Theologiae 1-2,q3, a2)


"현실에 살고 있는 상태의 인간을 위한 최상의 완성은 신과 결합된 바로 그 행위에 비례한다. 그러나 현실에서의 인간의 행위는 영원히 지속적인 것도 아니고 완전하고 통일된 것도 아니기 때문에, 늘 중단되고 다양하게 전개된다. 그래서 현실에서의 행위는 완전한 행복을 가질 수 없다."


즉, 완전한 행복은 현실에서의 삶에서는 이룰 수 없고, 따라서 현실에서의 삶의 목적은 실현될 수 없는 것이죠. 부분적이고 불완전한 행복이나마 성취하면 할수록 점점 더 완전한 행복에 가까이 갈 수는 있겠죠. 그렇다고 그것을 선지처럼 '실현된다.'고 볼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또한, 아퀴나스에게 있어서 완전한 행복은 저 너머에 있는 것입니다.

삶(불완전한 행복) -> 죽음 -> 완전한 행복

이렇게 도식화한다면, 현실의 삶에서는 완전한 행복이 아닌 부분적 행복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삶의 목적은 절대로 실현될 수는 없습니다.


② 갑 : 덕은 건강과 명예처럼 행복을 위한 수단일 뿐이다.

또, 하나 놀라운 선지입니다.

이것을 틀린 선지로 내놓았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맞는 선지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존재를 질료-형상의 연쇄구조로 설명합니다. 마찬가지로 아퀴나스의 도덕의 세계도 수단-목적의 연쇄구조를 가지고 있지요. 그런데 수단과 목적은 상대적인 개념입니다. 목적이 어떨 때는 다른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되기도 하죠. 예를 들어 내 기술을 이용해서(수단) 돈을 벌었고(목적), 다시 돈을 벌어서(수단) 행복해졌다면(목적), 돈은 수단이면서 동시에 목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이런 연쇄구조의 제일 마지막은 결국 최고선인 행복이 됩니다. 완전한 행복은 가장 마지막에 이룰 수 있는 완성 그 자체이기 때문에, 최고선인 행복을 제외한 모든 것은 수단이 됩니다. 덕이 영혼의 활동은 맞으나 영혼의 활동이라고 해서 그것이 목적이 아니듯(내 영혼이 활동한다고 해서 신의 은총이 있는 것이 아니며, 오로지 신의 은총은 신이 인간에게 부여할 때만 가능) 한낱 수단에 불과하게 됩니다.







<윤리와 사상 11번 ㄱ선지 오류, 교육과정 이탈>


윤리와 사상 11번 ㄱ선지 오류, 교육과정 이탈


ㄱ. 갑 : 행복은 신에 대한 직관적 인식에서 나오는 만족일 뿐이다


이 선지는 틀린 선지로 되어 있으나 맞다고 해석해야 옳습니다.


스토아 철학자들의 소재는 이성적 우주인 로고스입니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세계의 구성 원리를 크게 둘로 보았는데, 하나는 수동적인 질료이고, 다른 하나는 능동적인 원리, 즉 질료 속에 내재하는 로고스로 보았습니다. 로고스는 세상 만물을 생성하고 소멸시키는 근본 원리이며 자연이고 신이라고 보았습니다. 인간으로 보자면, 사람 안에서 생각하고 말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이성'의 형태로 존재하는 로고스로 보았죠. 인간에게 있어 가장 탁월한 합리성이란 자연-신과 일치하려고 하는 삶에 있습니다.


"따라서 자연을 따라가는 삶이 목적이 되고 이것은 곧 자신의 자연적 본성을 따른 그리고 전체(우주)의 자연적 본성에 따른 삶이고 공동의 법이 규제하는 그 어떤 행위도 수행하지 않는 삶이다. 공동의 법이란 만물을 관통하는 옳은 이성이고 이것은 존재하는 것들의 통치를 앞장서서 수행하는 ㅈㅔ우스와 동일한 자이다. 행복한 자의 덕과 삶의 순조로운 흐름은 이런 것이다 ; 각자의 고유한 정신과 전체(우주)를 통치하는 자의 의지의 조화로운 일치에 의거해서 모든 것을 수행하는 것이다."(이창우2006)


위의 인용글을 보면, 스토아 철학자들은 자연을 따라가는 삶이 목적이 된다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행복한 자는 통치하는 자(신)와의 조화로운 일치에 의거한다고 보았습니다.


"좋은 것과 나쁜 것의 원칙이나 탁월함(arete, 덕)이나 행복에 도달하기 위한 길로서는, 보편적 본성으로부터 그리고 우주의 통치(dioikesis)로부터 출발하는 길보다 적절한 길은 없다... 좋은 것과 나쁜 것의 원칙은 이것들과 결합이 되어야하기 때문이다. 좋은 것과 나쁜 것의 원칙에 관해서는 이것들보다 더 좋은 다른 출발점이나 뒷받침은 없다. 우리가 받아들여야 할 자연의 관조(혹은 자연학적 관조)는 바로 오로지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구별해내기 위한 것이다.(이창우 2006)


결정적으로 자연의 관조(신에 대한 직관적 인식)는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구별해내는, 행복(만족)에 도달하기 위한 길이라고 분명히 나와 있습니다.


ㄱ. 갑 : 행복은 신에 대한 직관적 인식에서 나오는 만족일 뿐이다


문제는 ‘만족일 뿐이다’라고 애매하게 작성한 부분입니다. 즉 행복은 신에 대한 직관적 인식에서 나오는 것 단 하나일 뿐이며, 이것 외에 다르게 판단할 수 있는 여지는 없다는 거죠. 그렇다면, 출제자는 행복은 신에 대한 직관적 인식 외에 그 무엇이 있음을 밝혀야 합니다. ‘이의제기 이상 없음’이라고만 쓰지 마시고 그 근거를 꼭 제시해 주길 당부합니다.


“스토아학파 사상가들은 이성에 따른 삶을 살 때 평온한 삶을 살 수 있다고 보았다. 이성에 따른 삶이란 자연에 따른 삶이자 신의 예정과 섭리에 따른 삶이며, 덕에 따른 삶이다.” (수능특강 91페이지)


혹시라도 수능특강 내용을 근거로 해서 이 선지가 틀렸다고 주장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이성에 따르는 삶은 관조를 통해 가능합니다. 자연에 따르는 삶은 곧 신을 따르는 삶을 말합니다. 신의 예정과 섭리도 신을 따르는 삶입니다. 최고신이 가진 덕을 따르는 것도 신에 대한 관조에서 비롯됩니다. 비록 수능특강에서는 여러 이유를 들었지만 결국에는 신에 대한 관조 외에는 행복에 이를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제시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요. 위 수능특강 해설은 원문에서 나온 글이 아닌 해설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출제자께서는 ‘~일뿐이다’라고 했을 때 그것을 꼭 원문을 인용해서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요. 그것을 밝힌다 한들, 그 내용은 고등학교 교육과정을 넘어서는 것이겠죠. 하다못해 수능특강에도 나오지 않는 것이 되겠지요. 결국 어떻게 해석하든 이 선지에 문제가 있음은 확실합니다.







<윤리와 사상 12번 루소의 자연 상태와 사회 상태>


늘 좋은 양질의 문제를 고심해서 내어 주셔서 학교에서 학생들 지도하며 많은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늘 감사드립니다.


이번 모평 문제 중 윤사 12번 문제에 대해 한 가지 생각해 주셨으면 하는 부분 있어 글 드립니다.


12번의 선지 4번이 정답인데 루소가 자연 상태는 평화롭게 보았지만 사회 상태를 평화롭지 않게 보았다는 내용입니다.


이에 대해 루소가 "사회 계약설"에서 다른 견해를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 적어봅니다. 참고 부탁드립니다.


고맙습니다.


④ E : 자연 상태는 평화롭다는 점에서 사회 상태와 구분됨을 간과한다.


루소의 자연 상태에 관한 견해


1. 루소는 자연 상태에서 인간이 자기 보전을 방해하는 장애물들의 저항이 계속되다가 각 개인이 저마다 그 상태에서 자신을 유지하기 위해 쓸 수 있는 힘을 능가하는 시점에 이르게 된다고 봅니다.(루소, 이재형 역, “사회계약설”, e북 34쪽)


2. 루소는 “각 개인에게 어떤 권리라도 남아 있다면 개개인과 공중 사이에서 심판을 내려줄 높은 권력자가 없으므로, 각 개인은 어느 점에서는 자신의 심판관이 되고, 개인 각자가 모든 점에서 자신의 심판관이 되겠다고 나서 자연 상태가 여전히 존속될 것”이라고 하여 자연 상태의 존속을 부정적으로 기술하고 있음.(루소 저, 방곤 역, “사회계약설”, 32쪽)


3. 루소는 자연 상태가 본능과 육체적 충동이 인간의 행위를 지배하고, 행동에서 도덕적 의의가 결여되어 있는 상태라고 합니다. 즉,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는 상태라고 봅니다. 그리고 개인이 무지하고 단순한 동물에 불과한 상태라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사회 계약을 통해 “자연 상태로부터 해방되고, 무지하고 단순한 동물에 불과한 사람이 지적인 존재 즉 한 인간이 된다”고 봅니다. 그리고 자연 상태에서 단순한 욕망을 따르는 삶을 “노예적인 굴종”으로 표현합니다. 사회 계약을 통해 이러한 자연 상태에서 벗어나 시민 사회로가 되었을 때 도덕적인 자유를 얻게 되고, 인간이 진실로 자신의 참된 주인이 된다고 합니다. (루소 저, 방곤 역, “사회계약설”, 38-39쪽)


4. 방곤 역의 “사회 계약설”에 나오는 자연 상태에서 “단순한 욕망에 따르는 삶 즉 노예적인 굴종”을 최석기 번역의 “사회 계약설”에서는 “단순한 욕망의 충동에 따르는 노예 상태”(173쪽)로, 이재형 번역에서는 “오로지 욕망의 충동에만 따르는 노예나 다름 없는 예속 상태”(e북 42쪽)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5. 루소는 “사회계약설” 제1부 제8장 “시민사회에 대하여”에서 자연 상태와 사회 상태를 대비하고 있습니다. 자연 상태는 인간의 행위를 본능이 지배하는 대신 사회 상태에서는 정의가 지배하고, 자연 상태에서는 인간 행동을 육체적 충동이 지배하는 대신 사회 상태에서는 도덕적 의의가 부여된다고 합니다. 자연 상태에서는 자기가 좋아하는 것이나 취향에 따르기만 했지만 사회 상태에서는 이제는 먼저 자기의 이성에 묻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사회 상태에서는 개인의 능력이 자극받아 발전하고, 사상은 폭이 넓어지고, 감성은 고상해지고, 그의 영혼 전체가 승화되므로 자연 상태로부터 영원히 해방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연 상태에서는 무지하고 단순한 동물에 불과했지만 사회 상태에서는 지적인 존재 즉 한 인간으로 되기에 행복한 순간으로 축복해야 한다고 합니다.


또 자연 상태에서는 단순한 욕망에 따르는 노예적인 굴종의 상태임에 비해 사회 상태에서는 도덕적인 자유를 얻게 되어 인간이 진실로 자신의 참된 주인이 될 수 있게 된다고 합니다.


이러한 루소의 입장에 비춰볼 때 선지의 “자연 상태는 평화롭다는 점에서 사회 상태와 구분됨”은 루소의 “사회계약설”의 입장과는 다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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